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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s talk]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이 문제다

2023-11-13 이철배 센터장
현 LG젅 CX 센터장 이철배 부사장의 프로필. LG전자의 고객경험여정(CEJ, Customer Experience Journey) 전반에 이르는 총체적, 선행적 고객경험 연구 강화, 전략 및 로드맵 제시, 전사 관점의 고객경험 혁신과 상품 서비스 사업모델 기획 등을 총괄하는 CX (Customer eXperience) 센터를 맡고 있다

얼마 전 유명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하다 고속도로 진입로에서 색깔로 차량의 길을 안내해 주는 안내선을 처음 제안한 분의 인터뷰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의 복잡한 입체교차로에서 올바른 진입과 진출구가 어딘지 정확히 몰라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은 많은 운전자들에게 좋지 못한 경험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로 2011년경 영동고속도로 안산분기점에서 인명사고를 동반한 4중 추돌사고가 발생했고, 한국도로공사에서는 유사 사고 예방을 위한 대책으로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합니다. 가야 할 방향에 대해 신속한 판단이 필요한 고속도로 진입∙진출구 상황에서 직관적인 시각적 인식이 어려운 상황임을 간파했기에 나온 지침일 것입니다.

당시 이 제안자는, 크레파스로 그림을 그리는 자녀의 모습을 보고, “이거다!” 하면서, 노면에 색깔로 차량 진행을 유도하는 선을 그리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자연스럽게 내비게이션이 안내해주고 있는 분홍색, 녹색 안내선을 따라 주행하라는 아이디어가 왜 진작 나오지 않았나 싶지만, 당시 도로 위에 표시할 수 있는 색은 하얀색, 노란색, 적색, 청색 정도로 제한되어 있었고, 틀을 깨는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새로운 색깔의 유도선 덕분에 유사 교통사고의 빈도가 현격하게 줄고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는 큰 효과를 낳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훌륭한 예처럼, 주어진 문제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이 문제다.” 언젠가부터 필자가 책을 쓴다면 이 문장을 책의 제목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인생에서 혹은 회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문제들을 풀어야 할 때마다, 문제의 핵심을 간파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는 경험치가 쌓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결할 ‘문제’(Problem)라고 일컫는 것은 ‘문제점’이 아닌, ‘우리가 풀어야 할’, ‘1번 문제’와 같이 출제된 “풀기 위한 문제”(Question)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기반으로 ‘문제 해결 프로세스’라는 말이 생겼고, 창조적 문제해결 방법인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 도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제해결 프로세스

문제 해결 프로세스는 보통 다음과 같이 5단계를 거칩니다.

전형적인 문제해결 프로세스 5단계. 1. 문제인식, 문제 재정의, 목표 설정 2. 문제분석, 현상 분석, 방향설정 3.대안창출, 세부idea, 발산전개, 4.대안평가, idea 가치 검증, 타당성 검증 5. 대안제시, 실행계획, 로드맵 제시.
전형적인 문제해결 프로세스 5단계

STEP1. 문제 인식

문제 해결 프로세스의 첫 번째인 ‘문제 인식 단계’는 문제가 생성된 배경을 파악하고, 배경 속 요인들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단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문제 이면에 숨겨진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 문제 해결을 통해 이루고 싶은 바를 정의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고객에게 어떤 말과 행동을 이끌어 내겠다는 외부적인 목표뿐 아니라 상사에게서 어떤 반응을 얻어 내겠다는 것과 같은 내부적인 목표도 해당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문제를 재정의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는 문제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어떤 문제는 한 번에 풀 수 있지만, 어떤 문제는 보다 작은 문제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고, 또 어떤 문제는 인과 관계로 엮여 있기도 합니다. 구조가 복잡한 문제는 수학에서 인수분해를 하듯 작은 단위 문제의 조합으로 나누어 문제의 차원을 낮춰야 합니다. 흔히 너무 복잡해서 한 번에 풀리지 않는 문제를 ‘고차원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저차원적’ 문제들의 조합으로 바꾸는 것이죠. 이것을 ‘문제 구조화 과정’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헤어드라이어를 개발하라는 문제가 주어진 상황을 가정해봅시다. 이 문제를 손잡이와 흡기구와 배기노즐과 히터가 달린 기기를 개발하라는 문제가 아닌, ‘목욕 후 머리를 가장 편리하게 말릴 수 있는 제품을 개발하라’는 문제로 바꿀 수 있습니다. 다시 이것을 쪼개어,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면서, 바람의 열기를 쉽게 조정할 수 있고, 몸도 춥지 않게 말려줄 수 있는 기기를 개발하라고 재정의한다면, 아마도 더 나은 해결안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심리검사에서 대중화된 지표인 MBTI 역시 ‘개인의 심리 경향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같은 더 크고 복잡한 문제를 재정의한 결과입니다. 캐서린 브릭스와 이자벨 마이어스 모녀는 50여 년 간의 연구를 통해, 인간 심리를 ▲심리방향성(내향/외향), ▲인식형태(직관/감각), ▲판단기준(감정/사고), ▲생활양식(즉흥인식/계획판단)이란 4개의 기둥으로 분해하여 16개의 성격지표를 만들었습니다. MBTI는 오늘날까지 인간의 심리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조화하여 인간의 성향이라는 복잡한 문제를 보다 쉽게 인식하기 위해 활용되고 있습니다.

STEP2. 문제 분석

문제 인식이 문제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분해하는 발산(Divergent)의 과정이라면, 해결 방향성을 찾는 일은 수렴(Convergent)의 과정입니다. 최대한 함축적이고 명료한 방향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람직한 문제 해결을 위해 문제가 발생한 상황과 그 배경을 분석하는 일은 필수적입니다. 이를 통해 현재 내가 처한 상황 혹은 현재의 모습과 내가 목표로 하는 성공의 모습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 간극을 정량적 혹은 정성적으로 파악하면, 이를 좁히기 위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됩니다.

STEP3. 대안 창출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가지 방향성이 제시되면, 각각의 방향성 별로 다량의 해결 아이디어를 도출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아이디어는 큰 가치가 없어 보이나, 방향성 별로 몇 가지 아이디어들이 묶이면, 가치 있는 ‘콘셉트’로 진화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남들과 확실히 차별화되는 답을 얻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이에 보편적 기대 수준을 넘어서는 창의적 해결안을 찾기 위한 다양한 창의적 발상 방법론들이 오랫동안 연구되어 왔습니다.

서로 관련이 없어 보이는 것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것을 도출해 내는 시네틱스(Synectics), 선입견과 사전 평가에서 벗어나 확실히 불가능하다고 증명되지 않은 한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는 가능성의 추구 관점에서 창안된 형태분석법(Morphological Chart), 의도적으로 시험할 수 있는 7가지 규칙(대체-결합-적용-변형-변경-제거-재배치)을 활용한 창의력 증진법인 스캠퍼 기법(SCAMPER) 등 매우 다양한 방법들이 실제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창의적 아이디어를 내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제약 없이 무엇이든 제안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선행돼야 합니다. 문제 해결이라는 목표를 위해 현실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미래를 향해 도약해 보는 담대함과 용기를 발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STEP4. 대안 평가

누구나 자기 아이디어가 가장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겠지만, 대안은 철저하게 그것이 필요한 사람 입장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콘셉트 검증(PoC, Proof of Concept)이라는 방법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해결 대안이 필요한 사람에게 문제 해결을 위한 대안과 유사한 프로토타입을 경험해 보게 해서 가치를 느끼는지 효용성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STEP5. 대안 제시

최종 해결안 제시 단계에서는, 단지 최종 아이디어를 제안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실행에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사항 혹은 제약 조건에 맞는 단계 별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앞서 설명드린 문제해결 프로세스를 거쳐 탄생한 LG전자 가전 제품 사례 두가지를 만나보겠습니다.

LG-퓨리케어-360˚-공기청정기와 퓨리케어 오브제컬렉션
문제해결 프로세스 5단계를 통해 태어난 ‘LG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와 파생품 ‘LG 퓨리케어 오브제컬렉션 에어로퍼니처’

2016년 LG전자에서 출시한 LG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도 이와 같은 문제 해결 프로세스를 거쳐 탄생했습니다. 고객이 선호하는 새로운 공기청정기 콘셉트를 제안하라는 문제가 주어지자, LG전자 LSR(Life Soft Research) 연구소는 가장 먼저 공기에 대한 고객의 문화적 인식을 연구하고, 공기청정기를 구매하고 사용하는 모든 과정에서의 걸림돌이 무엇인지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하루 종일 공기청정기를 틀어놓는 한국 고객들이 공기청정기의 성능과 청정 범위,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상태라는 인사이트를 얻었고, 이것들을 만족시켜준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됐죠.

LG전자는 이를 위해 다양한 경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여 고객 평가 및 지불 가치를 검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균일한 공기 토출을 보여주며 실내 인테리어를 저해하지 않는 디자인과 내장 서큘레이터를 움직여 청정 공기를 멀리 보내는 기능을 반영한 콘셉트가 탄생했고, 다양한 고객 검증과정을 거쳐 마침내 제품이 출시됐죠. 이후, LG 퓨리케어 360˚ 공기청정기는 2세대까지 출시되게 되었고, 에어로퍼니처와 같은 파생 상품까지 나오며, LG전자는 국내 공기청정기 시장에서 1위1)의 입지를 공고히 다지게 됐습니다.

1) 20년~22년 공기청정기 제조업 고객만족도(NCSI) 조사 결과

LSR 고객연구소 Future to Tomorrow 사고 방법을 나타낸 그래프. 우측에는 산타 모자를 쓴 여성이 ThinQ앱으로 LG전자 냉장고를 조작하는 모습. 좌측에는 y축에 발전 수준, x축에 시간이라고 적혀있다. 좌측에서 우측으로 현재 기반 예측한 근미래, 그 위로 거시 미래 기반 예측한 근미래, 우측 대각선으로 거시 미래 기반 근미래 재구성이라는 텍스트와 함께 회귀하는 화살표, 그 하단으로는 미래 변화 방향성 조망이라고 적혀있다. 현재와 거시 미래 기반 근미래 재구성 사이를 잇는 반원 화살표가 삽입되어 있다
Future to Tomorrow 사고방법의 원리와 이로 인해 탄생한 무드업 냉장고

LG 디오스 오브제컬렉션 무드업(이하 무드업 냉장고)
LSR고객연구소의 사고 방법 중 하나로 ‘Future to tomorrow’가 있습니다. 고객 조사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래 변화 방향성을 조망하는 Forecasting 기법과, 이러한 거시 미래를 기반으로 보다 가까운 미래를 예측하는 Backcasting 기법을 활용하는 방법이죠. 해당 사고 방법으로 탄생한 대표적 제품은 색상변화 냉장고인 무드업 냉장고입니다.

무드업 냉장고의 기획은 공간가전을 지향하는 오브제컬렉션의 성공을 잇는 개인화, 맞춤화를 지원하는 가전상품을 탄생시키고자 하는 문제에서 시작했습니다. LG전자 LSR 고객연구소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고객들은 SNS의 알고리즘을 통해 컨텐츠와 서비스가 자신에게 최적화되는 개인화, 맞춤화에 더욱 익숙해졌고, 다양한 앱과 서비스 등 최신기술을 능숙하게 향유하고 자랑스러워하며, 친구나 지인들과 집에서의 모임도 늘어나고 있었죠. 이런 고객의 삶의 변화는 가전제품 사용행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며, 우리는 어떠한 준비를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위해, LSR 고객연구소는 한국과 미국의 고객 1만여 명의 생활을 면밀히 데이터로 기록하고, 다양하게 분석하여, 고객의 가전생활을 구성하는 요소를 구조화하고, 변화 방향성을 예측했습니다.

그 결과, 냉장고가 고객의 마음을 파악해서 알아서 최적의 색깔로 변신한다는 이상적 지향점을 설정하고, 그것을 구현 가능한 적정 기술로 거꾸로 현실화하여, 고객이 이사, 인테리어, 변심 등의 이유에 맞게 색상 조합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고, 계절별로, 이벤트별로 고객의 취향을 반영하여 엄선된 색상을 골라 쓸 수 있는 무드업 냉장고를 기획하고 출시하게 됐죠.

특히, 창의적 사고과정을 통해 보급형 TV에 쓰이는 일반적 LED와 도광판을 활용하여 냉장고 패널에자유로운 색상변환 기능을 구현했습니다. 이를 통해, 음식을 잘 보관해주는 기본적인 기능적 가치 위에 음식을 즐기는 시간과 과정의 경험이라는 상징적 가치를 접목해냈죠. 결과적으로 무드업 냉장고를 통해 가전제품의 정체성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가전생활 양식을 고객들에게 제안할 수 있었습니다.

기업이 당면한 문제들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직관과 창의성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이고 위대한 힘을 발휘해 왔지만,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이 갈수록 더 복잡해지고 모호해지면서 직관과 창의성에만 기대기에는 한계가 있음이 분명해졌습니다.


복잡하고 모호한 문제는 여러 구성권이 함께 참여하는, 잘 정립된 프로세스의 도움을 받아 더 이상적인 해결책을 낼 수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여 재정의하고, 풀 수 있는 문제로 구조화하여, 바람직한 미래 모습을 설정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들을 도출해서, 고객 가치라는 잣대로 엄정히 평가한 다음, 우리의 상황에 맞게 최적화하는 것이죠.

고도로 복잡한 오늘의 환경 속에서, 어쩌면 누구나 다 알 법한 기본에 다시 한번 충실해 보는 것이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잘 풀어낼 수 있는’ 열쇠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