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첫 사표를 쓴 까닭은?

2014.12.08 박헌건

LG전자에 입사 후 풍운의 꿈을 안고 제조 부서에서 1년을 보낸 뒤 당당히 연구소 기획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사무실에 도착하니 샤프한 인상의 선배들이 오랫만에 신입이 왔다며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신다. 불안한 마음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다.

내 생애 첫 사표를 표현한 일러스트. 사직서 봉투에서 한 남성과 다양한 물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 일러스터 : 서은주

[박헌건의 리더십 칼럼] ④ 내 생애 첫 사표

부서 배치를 받은 후 안경을 쓴 깐깐한 인상의 리더와 면담을 한 후 드디어 머리가 희끗한 선임에게 배치되었다. 오랫동안 히터 개발에만 몰두하신 전문가였다. 작은 코일 모양의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히터라는 부품을 국산화/저가격화/이원화하는 업무였다. 선임은 첫 과제로 책장에 널려있는 수 십권의 서류 박스를 정리하라고 했다. 일본어로 쓰여진 서류들이 너무 많다. 일본어 열심히 해야겠다.

다음은 관련 부서 사람들과 외부 업체 사람들을 소개해 주기 시작했다. 한 달 가량은 새로운 사람 만나고 인사하고 밥먹고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이 선배는 특이한 습관이 있다. 신입이 오면 보통 2~3개월 정도 실무 교육(OJT)을 해 주는데 그것도 없이 실물 위주로 보고 필요하면 스스로 찾아 공부하라는 것이다. 공부할 자료는 내가 정리한 서류 박스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알 수 없는 그래프와 표만 가득한데…도대체 뭐가 있다는 것일까?

여러 갈래길에서 선택하지 못하는 직장인 일러스트

미생에서 완생으로…

연구소는 신입인 나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한다. 업무를 배우기보다는 우리 그룹 전체의 잡일을 주로 하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나마 좋은 점이라면 교육이 많다는 것이다. 보통 아침 1시간은 개인적으로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일본어나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느 날, 선임이 나를 부른다. 현재 국산화 진행 중인 제품의 진행 현황을 확인해 오라는 것이다. 그동안 공부를 많이 했으니 제품을 만드는 공장에 직접 가서 개선할 점이 없는지 보고 오라고 했다. 드디어 내가 할 일이 생겼구나! 몸이 근질근질하던 차에 드디어 내가 업체를 방문해 당당히 연구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갑자기 기운이 솟고 의욕이 불탔다. 과연 혼자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지만, 나에겐 제조 경험 1년이 있지 않은가….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회사에 도착해 공장장의 환대를 받으며 차를 한잔 했다. 꼬박꼬박 존대말로 예우하는 공장장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제조 공정 전반적인 부분과 모델 진행 현황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정장을 입은 근로자의 모습과 작업복을 입은 근로자가 나란히 서 있는 일러스트

공정을 흘러가는 제품은 잘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제품은 현미경으로 검사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작고 전기적, 화학적 특성을 평가해야 불량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물건이 잘 나오고 있다는 담당 부장의 설명을 들으면서 내일 납품하는 물건에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솔직히 설명을 듣지 않으면 신입인 나로선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모르는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이왕 간 김에 공장에서 개선할 점이 없는지 확인하라는 선임의 말이 기억났다. 생산 라인에 들어가 다시 한번 둘러보았다. 내가 보기에 라인 구석구석에는 결함이 참 많아 보인다. 제조에서 눈이 높아진 덕분이야…. 어떻게 이렇게 개선점들이 잘 보일까…

몇 가지 개선점을 들고, 공장장과 정리 회의를 진행한다. 정리 정돈이 잘 안 되어 있다고 몇가지 개선점을 얘기하자 공장장의 낯빛이 굳어지는 것이 보인다. 잘하고 있는거야… 당당히 연구소로 들어와 상황을 보고하자 왠지 사수의 표정이 그리 밝지 않다.

“박 기사” 
“예…?”
“당신 뭐하고 온거야?”
“예?”
“공장장에게 이야기한 것들이 뭐냐고?”
“개선점에 대해서 찾아보라고 해서요.”

 

그 날 이후 선임과의 관계는 싸늘하게 변했고, 공장에도 갈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새로운 후임 사원이 왔고, 그 친구 전공이 업무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내 업무를 바꾸라고 한다.

하늘이 노랗다. 선임이 왜 나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할까? 선임은 그룹장과도 이미 협의했다며 3개월 정도 일했으니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고 한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음날 드디어 처음으로 회사에서 사표라는 것을 차분히 써내려 갔다.그리고 그룹장을 직접 찾아가 면담을 한다. 비장한 각오로 사표를 손에 들고…

어느덧 25년차인 제가 그 때의 박 사원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박 사원, 회사생활을 하다보면 일이 바뀌는 경우가 흔하단다.특히 회사생활 3년 이내는 어떤 일이 주어져도 달갑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주어진 일을 처리해 보게나.한가지 일을 해도 좋고, 여러가지 일을 해도 좋아. 자신이 선택하는 것보다 선배들의 선택이 더 넓고 깊은 경우가 많다네.

회사는 자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곳이 아니라 회사가 필요로 하는 일을 하는게 직원이라는 것을 기억하게나. 그 때는 잘 안보이는게 정상이네. 3개월을 잘 참고, 3년을 버텨 보게나, 그러면 회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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