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 여름, 그리고 夏(하)

2015.08.19 유광종

여름은 더위의 대명사다. 그런 무더운 여름 피하는 일이 피서(避暑)다. 暑(서)라는 글자가 궁금해진다. 뜨거운 태양을 가리키는 日(일) 아래 사람을 지칭하는 者(자)가 붙었다. 이렇게만 보면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고대 초기 한자 흐름에서 이 글자는 액체 등을 끓인다는 뜻의 煮(자)라는 글자 모습으로 먼저 나온다.

따라서 暑(서)는 뜨거운 태양 아래 놓은 끓는 물이라는 의미 조합이다. 무더움, 뜨거움의 정도가 한껏 높아지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래서 무더운 여름을 대표하는 글자로 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아무래도 우리의 관심은 여름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글자 夏(하)에 더 몰린다.

[한자 그물로 중국漁 잡기] ⑧ 열매, 여름, 그리고 夏(하)

순우리말 여름은 유래가 어떨까? 우선 한글을 창제할 때 함께 지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한 대목을 보자. 뿌리가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그런 나무는 꽃이 좋고 열매도 많이 맺는다고 했다.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 그치지 않아, 내를 이뤄 바다에 이른다. 웬만한 한국인은 이 글 다 안다.

나무에 열린 청포도

아름답기 그지없는 우리말이다. 원문에서 ‘열매’는 ‘여름’으로 나온다. 이 여름과 우리가 지금 맞고 있는 계절 여름은 상관이 있을까. 있다고 볼 수 있다. 어원(語源)을 따지는 글은 여름이라는 낱말이 해(日), 나아가 농사를 통해 열매를 가꾸는 일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여름은 일조량(日照量)이 가장 풍부해 농사가 활발해져 열매를 맺는 계절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본다. 이 점은 한자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름을 가리키는 한자 夏(하)의 초기 형태를 보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 그리고 손에는 칼이나 낫으로 보이는 기물(器物)을 들고 있는 꼴이다. 따라서 농사일에 열심인 사람의 모습이라고 푼다.

고통스런 여름을 견뎌야 알찬 열매를 맺는다

여름을 일컫는 한자 낱말은 제법 많다. 햇빛이 가장 강렬해 더위를 가리키는 글자가 많이 등장한다. 염천(炎天)은 우리에게 낯익다. 불꽃(炎)과 같은 날씨(天)를 일컫는다. 같은 맥락의 낱말이 炎序(염서), 炎節(염절), 염하(炎夏)다.

햇빛이 충만해 붉은 기운을 많이 지닌다고 해서 朱夏(주하), 朱明(주명), 朱火(주화) 등으로도 불렀다. 長嬴(장영)이라고도 하는데, 자라고(長) 차오른다(嬴=盈)는 뜻이다. 회화나무에 꽃이 핀다고 해서 槐序(괴서)라고도 했다. 운치는 퍽 있으나 용례는 많지 않아 조금은 낯선 낱말이다.

여름이라는 계절을 이야기할라치면 그 이름의 어원에도 담긴 ‘열매’의 의미를 놓칠 수 없다. 그런 열매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한자는 果(과)와 實(실)이다. 果(과)라는 글자 자체가 나무(木) 위에 달린 열매를 표현하고 있다. 實(실)은 초기 한자 형태에서 직접적으로 열매를 가리키지 않았다. 집을 지칭하는 宀(면)에 재물을 가리키는 貝(패)와 그를 담는 그릇이 놓여 있는 모습이다.

재물이 채워져 있는 상자가 집안에 놓인 꼴이다. 이로써 ‘채우다’ ‘채워지다’의 뜻, 나아가 꽃이 떨어진 뒤 맺어지는 열매의 의미를 얻었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식물이 맺는 열매를 과실(果實)이라는 낱말로 표현한다. 열매를 맺는 일은 결과(結果), 결실(結實)로 적는다.

과실(果實)은 생명이 자라나 단단히 영글면서 생긴다. 단단히 영근 열매를 보면서 만들어내는 말이 과감(果敢), 과단(果斷)이다. 영글지 못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를 표현하는 단어가 부실(不實)이다. 중국인이 많이 쓰는 성어 하나가 있다. 겉은 번지르르한데 속은 영 아닌 경우다. 華而不實(화이부실)이다.

서울 남산의 한 구석에서 촬영한 가을의 감나무

서울 남산의 한 구석에서 촬영한 가을의 감나무.
무더워 고통스럽기까지 한 여름을 고스란히 견딘 식물이 이 감나무처럼 알찬 열매를 맺는 법이다.

늦더위가 좀체 가시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더움에 대한 짜증으로 기분만을 잡칠 필요는 없다. 이 무더운 여름의 햇빛과 열기에 속을 알차게 채우며 자라고 익는 열매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런 열매 익는 여름을 바라보며 어느덧 무더움 자체에 감사를 드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 여름에 스스로를 돌아볼 필요도 있다. 나는 알차게 열매를 맺기 위해 부지런히 내 갈 길을 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알곡이 착실하게 자라 그 스스로의 무게로 고개를 숙이듯이, 우리는 충실(充實)과 내실(內實)을 향해 어느 정도 다가서 있는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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