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진의 달콤한 인생] 혁신가 이소룡

2012.03.05 최연진

홍콩 침사추이 근처 스타의 거리에 가면 가장 인기 있는 곳이 이소룡 동상이다. 이소룡을 잘 모르는 요즘 사람들도 웃통을 벗어부치고 독특한 무술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지 이곳에서 사진을 많이 찍는다.

[최연진의 달콤한 인생] ① 혁신가 이소룡

이소룡 동상 사진

세계적인 배우이자 혁신가, 이소룡

홍콩이 낳은 세계적 스타 이소룡은 사실 대단한 혁신가였다. 그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실험적으로 추진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이 개발한 무술 절권도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영화를 적극 활용했다.

절권도(截券道)란 상대의 주먹을 차단하는 무술로,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해 방어하고 집중력을 흩어놓는 공격으로 상대를 무너뜨린다. 그래서 절권도는 무리한 자세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가까운 적의 신체부터 공격해 들어가는 특징이 있다. 여기에는 서양인보다 팔다리가 짧은 동양인의 단점을 극복하고, 시력이 나빠 6세 때부터 안경을 썼던 이소룡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 들어 있다.

이소룡 포스터 사진

몇 년 전 세계절권도연맹 한국 총본관의 김종학 관장을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당시 그에게 절권도를 배우던 배우 장혁을 불러서 시범을 보여준 장면이 기억난다. 김 관장은 팔이 긴 상대가 주먹을 내지르면 한 손으로 손등을 쳐서 방향을 바꾼 뒤 다른 손으로 손목을 때리고, 다시 다른 손으로 팔꿈치 관절을 친 뒤 어깨를 훑는 식으로 전광석화처럼 상대의 신체를 타고 올라가며 공격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절권도를 만들다

이소룡은 기존 무술들이 형식에 얽매이다 보니 실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고 미국 유학 당시 가장 실용적이며 혁신적인 무술 절권도를 개발했다. 이를 위해 이소룡은 쿵후, 유도, 무에타이 등 각종 무술을 혼합했고 심지어 끊임없이 껑충껑충 뛰어다니는 무하마드 알리의 발놀림까지 차용했다. 그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평상복을 입도록 했다. 실전에서 도복을 입고 싸우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 이소룡이 영화 ‘사망유희’에서 신축성 좋은 노란 트레이닝복을 입고 나온 것도 도복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소룡 피규어 사진

이소룡의 이 같은 실용정신과 혁신성은 영화 ‘정무문’에서 볼 수 있다. 러시아 무술가와 대전을 벌이던 중 암바에 걸리자 그는 상대의 다리를 물어뜯는다. 그는 평소에 제자들에게 “팔다리를 쓸 수 없다면 물어라. 죽는 것보다 낫다”고 가르쳤다.

이소룡 포스터 사진

홍콩 영화계를 바꾼 이소룡

이소룡은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등 할리우드 스타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쿵후’ 등 미국 TV 시리즈나 영화진출을 시도했지만 여의치 않자 홍콩으로 돌아와 영화를 찍었다. 이때 그는 홍콩 영화계를 뒤집었다. 1970년대 홍콩 영화계는 배우던 제작진이든 감독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고 돈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자신이 각본 감독 주연 제작까지 했던 이소룡은 이 관행을 뒤집었다. 영화로 벌어들인 돈을 감독과 배우, 심지어 조명 촬영 등 제작진과 똑같이 나눠 가졌다. 동기 부여가 되지 않으면 영화가 발전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이 바람에 홍콩에서는 영화관계자들이 이소룡처럼 자신들을 대우해달라며 다른 영화사에 항의했고, 결국 홍콩 영화계가 바뀌는 전기를 맞게 됐다.

이 같은 혁신 덕에 이소룡 영화는 액션이나 영화기법상 기존 무술 영화와 확연히 다른 파격으로 전 세계에 돌풍을 일으켰다. 그랬기에 그가 1973년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지 39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는 전설이 돼서 사람들의 기억에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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